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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방팔방 도배해도 못떼낸다… ‘현수막 공화국’
작성자 법무법인 온담
작성일자 2022-04-25

집회 신고만 하면 개수 제한없이 게시 가능, 강제철거 못해


‘너희 밥은 진지고 우리 밥은 먹이냐.’










지난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 돌계단에 ‘너희 밥은 진지고 우리 밥은 먹이냐’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현수막은 수일 전 민노총이 문화부 산하 기관 소속 비정규직 근로자의 밥값 인상을 요구하며 건 것으로 알려졌다. /고운호 기자


불국사 청운교·백운교를 형상화한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 돌계단 곳곳에 18일 이런 글이 적힌 민노총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계단은 관람객들의 사진 촬영 명소다. 하지만 이날 여섯 살 아들과 이곳을 찾은 관람객 윤모(37)씨는 돌계단 앞에서 이리저리 현수막을 피해 사진을 찍어 보려다가 “안 되겠네”라며 돌아섰다. 이런 현수막은 작년 8월에도 1개월간 걸렸다. 인스타그램을 검색하면, 당시 방한 외국인들이 이 돌계단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 현수막까지 그대로 담겨 있다. 그 사진에 ‘(드라마) 대장금이 기억난다’ 등 한국 여행 소감을 적어놨다. 박물관 측은 “관람객 입장에서 불편해도 우리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며 “노조가 자기 사업장 내에 현수막을 거는 것은 ‘합법적 노조 홍보 활동’이어서 강제 철거는 곤란하다”고 했다.


험악한 문구 가득한 시위 현수막이 대한민국 곳곳을 뒤덮고 있다. 관광지뿐만 아니라 레저 시설 입구, 대기업 본사 앞, 심지어 주택가에도 각종 현수막이 매일 새롭게 펼쳐진다. ‘현수막 공화국’이란 말까지 나온다. ‘현수막을 내걸기는 쉽게, 떼어내기는 어렵게’ 만들어놓은 법·제도, 노조 등 집단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관리 당국의 무사안일주의가 복합 작용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인천시 송도국제도시 잭니클라우스 골프장 정문 앞 도로에서는 올 초부터 해당 골프장 해고자들이 스피커를 동원한 시위를 매일 벌이고 있다. 골프장이 용역 업체를 교체하면서 발생한 해고자들이다. 이들이 골프장 입구에 펼쳐놓은 현수막이 100장이 넘는다.


현수막만 문제가 아니다. 시위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은 더 문제다. 경찰이 측정한 이 집회 최고 소음도는 90㏈. 기차가 25m 떨어진 곳에서 지나갈 때 들리는 소리 크기다. 이 골프장 15번 홀, 11번 홀 티박스에 서면 집회 현장의 시끄러운 민중가요와 구호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시위 현장에서 티박스까지 직선거리가 15번 홀과는 30m, 11번 홀과도 50m에 불과하다.


이용객 박모(50대)씨는 “집회 소음으로 티샷에 집중하지 못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근로자들도 사정이 있겠지만, 애꿎은 손님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골프장 관계자는 “경찰에 신고해도 그때뿐, 경찰이 돌아가면 다시 큰 소리가 난다”고 말했다.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GS타워 앞 도로에 걸려있는 현수막으로, GS칼텍스 측에 복직과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장련성 기자


삼성물산이 운영하는 안양컨트리클럽(경기 군포) 정문을 통과해 클럽하우스로 향하다 보면 길 양쪽에 8m짜리 대형 현수막이 줄줄이 나타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과 함께 ‘범죄자’ ‘노조 파괴 조직 범죄 실형’ 등 글을 적어놨다. 지난 2월쯤 민노총이 걸었다. 골프장에 오는 모든 손님이 이 플래카드를 본다. 이용객 문모(31)씨는 “기분 좋게 놀러 갔는데 현수막을 보고 나니 마음이 불편했다”고 말했다. 이 현수막 역시 민속박물관 사례처럼 ‘노조가 소속 사업장 내에 건 것’이란 이유로 사측이 함부로 떼지 못한다.


법적으로 다퉈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달휴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 전공)는 “현수막을 다른 곳에 게시할 수 있는데도 굳이 시설 운영에 지장을 주는 곳에 걸었다면 정당한 조합 활동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노조 등 떼쓰는 상대를 이겨봤자 더 험악한 방식을 들고 나올 게 뻔한데 실익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도 그렇다. 현대·기아자동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현대차는 서울 양재동 본사 입구에서 7년째 현수막 수십 장을 걸고 장송곡을 틀어놓은 채 시위를 벌이던 박모씨를 상대로 지난해 소송을 걸었다. 서울중앙지법이 소송 1년여 만인 올해 9월 18일 “시위 내용과 장송곡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현수막 내용도 회사 명예를 훼손한다”며 현대차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박씨에게 선고된 손해배상금은 1000만원으로, 현대차 측이 지출한 변호사비에도 못 미친다. 이마저 박씨가 항소해 2심 재판에 들어갔다. 게다가 2개월이 흐른 지금도 현수막과 스피커 시위는 계속된다. 현수막 내용이 일부 고쳐졌고, 장송곡이 민중가요로 바뀌었을 뿐이다.






20일 경기 군포시에 있는 삼성그룹 소유 골프장인 안양컨트리클럽 진입로 가로수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처벌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현수막은 지난 2월쯤 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지회 소속 노조원들이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지호 기자


현행법상 시위용 현수막은 ‘집회·시위를 위한 도구’로 인정해 허용된다. 경찰에 집회 신고한 장소에 30일간 게시할 수 있다. 개수 제한도 없다. 10장씩, 100장씩 걸어도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집회 참가자 없이 현수막만 걸리는 경우가 넘쳐난다.


20일 낮 12시 30분쯤 서울 종로구 경희궁자이 아파트 뒷편 도로에는 ‘서울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라는 단체의 현수막이 14개 걸려 있었다. 타깃은 아파트 맞은편 서울시교육청. 현수막 주변에는 참가자가 한 명도 없었다. 같은 날 송파구 서울동부지검 후문 앞에도 ‘도우미 진혜원은 풍속법 위반’ 등 현수막이 걸렸지만, 시위대는 보이지 않았다.


현수막의 비방 대상이 됐다고 함부로 현수막을 떼어내면 범법자가 된다. 재물 손괴나 절도 등 혐의가 적용된다.


배병일 전 법학교수회장은 “집회·표현의 자유나 노조의 쟁의권도 중요하지만, 그런 권리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타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침해하는 경우까지 무한정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집회·시위가 진행되는 시간에만 허용하는 등 관련 법령 보완이 필요하다”고 했다. 소병욱 법무법인 온담 변호사는 “시위용 현수막 게시에 관한 제한 규정을 만들고, 위반 시에는 현수막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쪽이 강제 철거 등을 신청할 수 있는 구제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